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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erature

신동흔 <살아있는 우리신화> 한겨레출판 2004

 

 

 

영화 ‘신과 함께’를 흥미롭게 본 기억이 난다. 이승과 저승을 이집 저집 넘나들듯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은근 부럽기도 했고, 다양한 캐릭터들의 언변과 무술을 듣고 보는 재미도 쏠쏠했고, 한편으론 몇백 년 동안 끊지 못하는 그 길고 질긴 인연이 섬뜩하기도 했다. <살아있는 우리신화> 속에서 만난 인물들과 이야기들에서도 이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사건과 사건의 연속, 말과 행동의 면면 속에서 만나게 되는 멀지만 친근한 이들, 비현실적이면서도 너무나 현실적인 이야기들, 여기에 신동흔님의 해석이 더해져 읽는 즐거움이 배가된다.

 

 

 

차례

1. 세상이 처음 열리다

2. 생명의 신, 삼신의 두 모습

3. 신은 어떻게 오는가

4. 이것이 신화다

5. 신비의 세계를 찾아서

6. 영웅신화의 숨결

7. 신과 신성 그리고 인간

8. 한라의 신, 한라의 영웅

9. 신화 속의 부모와 자식

10. 신화 속의 남과 여

11. 신화의 주역은 여성이다

12. 신성은 어디서 오는가

 

 

태초에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처음에 어떻게 생겨났을까? 그리고 또 인간은? 일상 속에서 자주 오고 가는 질문은 아니지만, 어쩌면 마음 깊은 곳에서 궁금해하고 있을지 모르는 의문들이다. ‘나’의 태생, ‘인간’이라는 존재의 근원, 그리고 이 ‘세계’가 생겨난 연유에 영향 받고 납득할만한 답을 찾고 싶어하며, 여기에 가치있는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그래서 각 문화권의 신화나 종교에서는 창세에 관한 이야기를 갖고 있는데, 우리나라에도 흥미로운 창세 서사들이 있다. 함흥의 「창세가」나 화성의 「시루말」, 제주도의 「초감제」와 「천지왕본풀이」 같은 신화가 그들이다. 제주도의 창세신화는 오늘날까지도 제의의 현장에서 장엄하게 구송되고 있다.

 

옛날 옛 시절에

미륵님이 한짝 손에 은쟁반 들고

한짝 손에 금쟁반 들고

하늘에 축사하니

하늘에서 벌레가 떨어져

금쟁반에도 다섯이오

은쟁반에도 다섯이라

그 벌레 자라나서

금벌레는 사나이 되고

은벌레는 계집으로 마련하고

은벌레 금벌레 자라와서

부부로 마련하여

세상 사람이 낳았어라

―함흥의 『창세가』에서

 

 

신비의 공간

인간이 깃들어 사는 이곳은 이승 또는 지상 하늘과 땅 사이의 넓고도 좁은 세상이지만 그것은 세상의 전부가 아니다. 저 위에 가없는 하늘이 있고, 이 아래 깊이를 측량할 수 없는 땅이 있다. 신비의 성채 ‘원천강’과 신비한 꽃이 가득 피어 있다는 ‘서천꽃밭’이 이런 낯설고 신비로운 대표적 공간이다. 부모님도 모르고 이름도 성도 나이도 모르는 한 여자아이가 있다.

“그렇다면 네가 오늘 우리를 만났으니 오늘을 생일로 삼고 이름도 오늘이라고 하자꾸나.”

그렇게 오늘이란 이름을 갖게 된 아이는 이런 의문을 갖게 된다.

“나의 부모님은 어떤 분일까?” 어디에 계실가?“

부모님이 원천강을 지키고 계신다는 말을 듣고 머나먼 길을 떠나는 오늘이. 오늘이의 부모님이 계시다는 원천강은 이런 곳.

높은 담장이 둘러쳐진 곳에 문이 네 개 나 있는데, 첫 번째 문을 열고보니 봄바람이 따스하게 부는 속에 진달래 개나리 매화꽃 영산홍 갖은 봄꽃이 피어 있었다. 두 번째 문을 열고보니 뜨거운 햇살 속에 보리와 밀 같은 곡식과 채소가 무성했다. 세 번째 문을 열고보니 너른 들판에 누런 벼가 황금빛으로 물결쳤다. 네 번째 문을 열고보니 찬 바람이 부는 가운데 눈이 세상을 하얗체 뒤덮고 있었다. 이 세상 사계절이 그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이성강 연출, 에니메이션 <오늘이>

https://www.youtube.com/watch?v=11J9A-3_6qA&t=8s

 

 

능동의 여인 자청비

바뀐 운명의 주인공, 남자로 태어날 것을 여자로 태어난 자청비는 누구라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아름답고 씩씩한 여인이다. 자청비는 열다섯 살 나던 해 주천강 여울에서 빨래를 하던 중 만난 문도령을 따라 나서, 자청비의 남동생인 척을 하며 한 스승 하래서 한 방을 쓰며 3년을 함께 공부하고 사랑에 빠진다. 능청스러움과 기지와 재주가 뛰어나 그 모습을 상상하면 절로 유쾌해진다.

하루는 잠자리에 드는데 자청비가 문도령 자리와 자기 자리 사이에 물대야를 놓고서 은젓가락 놋젓가락을 걸쳐놓았다.

“무슨 일로 그리하는가? ”

“전에 아버지한테 들으니 이렇게 하고 자리에 들어 젓가락이 떨어지도록 잠을 자면 글이 둔하다더군.”

그러고서 자리에 드니 문도령은 대야 때문에 자청비 옆으로 다가갈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젓가락이 떨어질까 한쪽 옆구리로 눕고는 다리가 저려도 돌아눕지를 못해 깊은 잠이 들지를 않았다. 그러든지 말든지 자청비는 이쪽 저쪽으로 돌아누우며 쌔근쌔근 잘만 잤다.

천상의 문도령과 혼인하려고 칼날 위를 걷기도 하고, 낭군을 대신해 인간 세상의 변란을 막으러 출전했다가 문도령을 다른 여인에게 빼앗기고, 결국 지상의 인간과 다시 인연을 맺는 자청비. 공부도 무예도 싸움도 베틀을 짜는 일도 시원시원하고 탁월하게 해내며 닥쳐온 시련도 온마음과 온몸으로 헤쳐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