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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l

조지프 캠벨 <신화와 인생> 갈라파고스 2009

 

 

캠벨은 박사 학위를 포기하고 1929년부터 1934년까지 5년 동안 숲 속으로 들어가 자유롭게 독서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뉴욕 주 우드스톡의 작은 오두막에 살면서 책만 파고들었다. 읽고, 또 읽고, 노트 필기를 하면서. 그 후 새라로렌스 대학의 교수가 되어 38년 동안 신화의 원형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하며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 책은 1983년에 에설런 연구소에서 조지프 캠벨의 강의를 들었던 다이앤 K. 오스본의 필기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거기다가 기존에 출간된 캠벨의 저서 가운데 관련된 부분의 인용문들을 발췌, 수록한 방식으로 꾸며진 일종의 선집이다. 원제는 「조지프 캠벨 편람(Joseph Campbell Companion)」이라고 되어 있지만, 사실은 캠벨의 강의록으로서 그의 사상에 대한 개론적인 성격의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조지프 캠벨의 이 책을 읽는 동안 <연금술사>의 산티아고가 떠올랐다. 자신의 ‘신화’를 완성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 사람. 비교종교학자이자 신화학자로 알려진 캠벨은 불교, 기독교, 흰두교의 교리를 풍부하게 인용하고 각국의 신화와 그 상징을 밝히는데 능통하다. 그의 사유가 한 개인의 실존적 독서에 강한 힘을 미치는 것은 개념이나 이론 그 자체을 밝히는 것보다, 그의 삶과 글이 산티아고와 같은 개인의 신화를 일깨우는 곳을 향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현세에서의 삶 [의식의 첫 번재 단계]

신화학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자신의 한가운데로 쏟아지는 에너지의 신비를 깨닫게 해 준다.

그 안에 여러분의 영원이 놓여 있다.(P.56)

 

신화는 우리가 깨어나는 의식과 우주의 신비 사이를 연결시켜 준다.(79)

 

두 세계, 곧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는 마치 삶과 죽음, 또는 밤과 낮처럼 서로 다르다는 말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영웅은 우리가 아는 세계에서 암흑의 세계로 들어간다. 이 암흑의 세계에서 영웅은 그 모험을 완성할 수도 있고, 거기에 갇힘으로써 우리들 앞에서 사라져 버릴 수도 있고, 엄청난 위험에 직면할 수도 있다. 영웅의 귀환은 그 저승에서의 귀환을 말한다. 이승과 저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하나의 세계다. 신화나 상징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는 바로 이것이다. 신들의 세계는 우리가 아는 세계의 잊혀진 부분이다.(116)

 

생존은 삶의 두 번째 법칙이다. 첫 번째 법칙은 우리가 모두 하나라는 것이다.(77)

 

내 지론은, 만약 여러분이 자신의 길을 가고 있으면 만사가 여러분에게 [자연스레] 찾아오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여러분 자신의 길이고, 어느 누구도 그 길을 앞서 지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런 전례도 없는 것은 당연하고, 따라서 모든 것이 그야말로 뜻밖이며, 그야말로 적시인 것이다.(90)

 

가장 큰 문제는 생명을 황무지로 도로 가져오는 것이다. 사람들이 진정성 없이 살아가는 곳으로.(116)

 

나는 임박한 핵폭발이며 우주의 붕괴에 대한 공포에 수반되는 엄청난 불안이야말로, 오고 가는 것 너머에 있는 중심을 한 번도 찾지 못한 사람들로부터 나온 불안이 투사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해 왔다. 만약 여러분이 영원이란 것에 대해 편안한 마음을 느낀다면, 우주가 폭발해 버리는 것조차 얼마든지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마치 여러분 자신의 죽음을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과도 마찬가지다. 이는 유기적 과정에 부합되는 일이다. 만물은 오고…… 또 가는 것이다.(140)

 

 

깨달음을 향한 길 [의식의 두 번째 단계]

그렇게 함으로써 이는 우리를 보디사트바의 방법-즉 영원에 근거하되 시간의 장 속에서 움직이는 자의 방법-의 마지막 공식으로 이끌어 간다. 시간의 장은 곧 슬픔의 장이다. “모든 삶은 슬픔으로 가득하다.” 정말 그렇다. … 여러분은-바로 여기서 아름다운 공식이 나오는데-“이 세상의 슬픔에 기쁜 마음으로 참여한다.” 여러분은 게임을 하는 것이다. 상처를 받을 수도 있지만, 여러분은 자신이 어떤 손상이나 성취조차도 초월하는 장소를 발견했음을 알고 있다. 여러분은 바로 거기에 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171)

 

융은 1909년에 이르러서야 신화와 꿈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했지만, 인도에서는 그런 사실이 영원으로부터 이미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러한 사실은 옴 또는 아움(A-U-M)이라는 철자에 함축되어 있다.(173)

 

여러분의 꿈을 글로 적어 보라. 그것이 바로 여러분의 신화다.(176)

 

융은 영혼의 구조에 관한 분석에서, 우리를 외부 세계와 연결해 주는 심리학적 기능 네 가지를 구분한 바 있다. 바로 감각, 사고, 감정, 직관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감각이란 뭔가가 존재함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기능이다. 사고란 그게 무엇인지 우리에게 알려 주는 기능이다. 감정이란 그 가치를 우리에게 평가해 알려 주는 기능이다. 직관이란 우리가 그 대상이나 그 상황에 내재된 가능성을 예측하게 해 주는 기능이다.(188)

상징학이란 것이 놀라운 까닭은 융이 말한 그 네 가지 기능이 거기 모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융은 다섯 번째의 것, 즉 그 한가운데 있는 것을 가리켜 ‘초월적 기능’이라고 지칭한다. 상징은 여러분이 바로 이 기능을 공략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상징이, 우리의 사고를 인도하는 곳은, 두뇌에 속하지 않는 영역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뇌는 충분히 그곳을 이끌 수 있다.(189)

 

여정의 목표는 여러분 자신을 의식적으로 발견하는 것이다.(222)

 

 

성스러운 삶과의 조우 [의식의 세 번째 단계]

미술의 드러냄(계시)은 윤리도 아니고, 판단도 아니며, 심지어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듯 인간성도 아니다. 오히려 그 드러냄은 만물을 통과해 빛나는 지고의 빛을 발하는 ‘형상’에 대한 놀라운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349)

 

예술의 기능이란 유형적이고 가시적인 세계의 소진 가능한 것을 열어 젖힘으로써, 그것들을 통해 광휘-여러분의 안에 있는 것과 똑같은 광휘-가 환히 비치게 하는 것이다.(358)

 

발레를 하는 사람들이 바 연습을 하는 과정에는 심미적인 것이라곤 전무하다. 춤을 추기 시작하더라도, 그들은 여전히 규칙을 생각하고 있으며, 그런 와중에 작품을 고안한다. 하지만 마침내 규칙이 녹아 없어지고 자연스러운 충동이 주가 된다. 예술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오랜 속담이 있다. “우선 모든 규칙을 배운 다음, 그 규칙을 모두 잊어버려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규칙들이 순수한 행동 속으로 녹아들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372)

 

영적인 것을 사랑하게 되면, 여러분은 세속적인 것도 얕보지 못할 것이다.(390)

 

여러분이 모든 것을 원한다면, 신들은 그것을 주리라. 하지만 여러분은 반드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425)